하야시 다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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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시 다다스(1850-1913)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1866년 영국 유학 후,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에 참여하여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외무차관, 청나라 특명 전권공사, 주러시아 공사, 주영 공사를 거쳐 제1차 영일 동맹 체결에 기여했다. 이후 외무대신, 체신대신을 역임하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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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다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백작 |
칭호 | GCVO |
본명 | 사토 신고로 |
다른 이름 | 사토 도사부로 |
출생지 | 사쿠라시, 시모사국 |
사망지 | 하야마, 미우라군, 가나가와현 |
안장 장소 | 아오야마 묘지, 도쿄 |
국적 | 일본 |
직업 | 외교관, 각료 |
배우자 | 하야시 미사오 (1875년 결혼, 1913년 7월 10일 사망) |
자녀 | 후쿠자와 기쿠 (딸), 하야시 마사노스케 (아들) |
부모 | 사토 다이젠 (아버지) |
친척 | 마쓰모토 료준 (형제) |
양부 | 하야시 도카이 |
경력 | |
외무대신 | 재임 기간: 1906년5월 19일 – 1908년7월 14일 |
소속 내각 | 제1차 사이온지 내각 |
체신대신 | 재임 기간: 1911년8월 30일 – 1912년12월 21일 |
소속 내각 | 제2차 사이온지 내각 |
학력 | |
모교 | 킹스 칼리지 런던 |
훈장 | |
훈장 | [[File:JPN Toka-sho BAR.svg|38px]]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 |
훈장 | [[File:대한제국 대훈위 서성대수장|38px]] 대훈위 서성대수장 |
2. 생애
1850년 사쿠라번(현재의 지바현 사쿠라시)에서 태어난 하야시 다다스는 네덜란드식 의술을 익힌 의사의 막내 아들이었다. 1862년 누나의 남편이자 에도 막부의 어의였던 하야시 도카이의 양자가 되면서 '하야시 도사부로'로 이름을 바꾸고 요코하마로 이주하여 선교사 제임스 커티스 헵번에게 영어를 배웠다.
1866년 막부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으로 건너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과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공부했다. 1868년 막부가 멸망한 후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탈주 함대에 합류하여 하코다테 전쟁에 참전했으나 패배하고 체포되었다. 1870년 석방된 후, 형의 소개로 무쓰 무네미쓰를 알게 되었고, 1871년 무쓰가 가나가와현 지사로 부임하자 현청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후 외무성으로 옮겨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하여 다시 해외를 방문했다.
1873년 이토 히로부미의 의뢰로 해외 공학을 조사하고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귀국한 후, 공부대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이후 공부성 권대서기관, 궁내성 장관을 겸임하고, 1885년 체신성 대서기관, 역체국장, 내신국장을 역임했다. 1888년과 1890년에는 각각 가가와현 지사와 효고현 지사를 역임했다.[36]
1891년 외무차관으로 임명되어 외무성으로 복귀, 청일전쟁 처리와 삼국간섭에 대응했다. 1895년 청나라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했으며, 청일전쟁의 공적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897년 주러시아 공사, 1899년 만국평화회의 위원, 1900년 주영국 공사를 역임했다.
1901년 독일 대리대사의 제안을 계기로 영국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고, 1902년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여 자작으로 승작되었다. 1903년 프리메이슨에 가입, 1904년 일본인 최초의 로지 마스터가 되었다. 1905년 초대 주영 대사로 임명되어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36]
1906년 귀국하여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 1907년 일불협약, 러일협약, 한일신협약 체결의 공적으로 백작에 봉해졌다. 1908년 외무대신을 사직하고, 1909년부터 1910년까지 《후일담기록》(後は昔の記)을 저술했다. 1911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체신대신으로 임명되어 외무대신을 겸직하기도 했으나, 1912년 내각 총사퇴로 은퇴했다. 1913년 뇌일혈로 사망했다.[37]
2. 1. 유년기 및 교육
1850년 가에이 3년, 시모사국 사쿠라 번(현재 지바현 사쿠라시)에서 난방의(네덜란드식 의술) 사토 다이넨·다키 부부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사쿠라 번의 번교 세이토쿠 서원(후에 지바현립 사쿠라 고등학교)에서 배웠다. 1862년 분큐 2년, 누나의 남편이자 에도 막부 어의 하야시 도카이의 양자가 되어 '''하야시 도사부로'''(林董三郎)로 개명하고, 부모와 요코하마로 이주하여 선교사 헵번의 헵번 학원(이후 메이지가쿠인 대학교의 전신)에서 클라라 부인에게 영어와 서양 사정을 배웠다.[3]1866년 게이오 2년, 막부의 개성소에서 실시된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막부 유학생으로 가와지 다로, 나카무라 마사나오 등과 대영제국으로 건너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공부했다.[4]
1868년 메이지 원년 6월에 막부 멸망과 보신 전쟁 발발로 인해 귀국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2. 2. 영국 유학과 하코다테 전쟁
1866년 게이오 2년, 하야시 다다스는 막부 유학생으로 가와지 간도, 나카무라 마사나오 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과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공부했다.[3] 1868년 메이지 원년 6월에 귀국한 후, 막부가 멸망하자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탈주 함대에 합류하여 하코다테 전쟁에 참전했다. 이때 사토 아즈마사부로라는 가명을 사용했다.[4] 1869년 패전 후 체포되었다가 1870년에 석방되었다.2. 3. 메이지 정부 출사
1871년 가나가와 현 지사 무쓰 무네미쓰에 의해 석방된 하야시 다다스는 메이지 정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에 합류하여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였다.[3]1866년 막부의 개성소에서 실시된 유학 시험에 합격한 하야시는 유학생으로 가와지 타로, 나카무라 마사나오, 외산 마사카즈, 미사쿠 케이고, 다이로쿠(후의 기쿠치 다이로쿠) 형제 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공부했지만, 1868년 6월 막부 멸망과 보신 전쟁 발발로 귀국 명령을 받았다. 여비를 마련할 수 없어 곤란을 겪던 중, 파리 만국 박람회 방문을 위해 유럽에 와 있던 도쿠가와 아키타케 등 사절단에 합류하여 아키타케의 원조로 일본으로 귀국했다.
1872년 말, 영국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그는 야마오 요조의 지시를 받아 공학료의 교직원 임명을 주선했다.[5] 그는 교장 헨리 다이어를 비롯한 교직원들과 함께 귀국하여 공학료의 관리로서 공부성 산하 공학료를 설립하는 데 힘썼다.
귀국 후, 하야시는 1869년 하코다테 전쟁에서 패전 후 체포되어 히로사키 번에 맡겨졌지만, 구로다 기요타카의 노력으로 1870년 4월에 석방되었다. 영어 교사, 주일본 미국 공사 찰스 데롱의 번역관을 거쳐, 형 마츠모토 료준의 소개로 무쓰 무네미쓰와 알게 되었다. 1871년 무쓰의 가나가와현지사 부임에 따라 요코하마로 돌아와 현청에 출사했고, 이어서 외무성으로 전근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의 보증으로 2등 서기관으로 선발되어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하여 다시 외국 유학을 떠났다.
2. 4. 공부성 및 체신성 근무
1873년 5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체류 중, 본국의 공부성으로부터 공부대학교 설립 준비를 위해 외국인 교사 고용을 명령받았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맹우이자 공학교 설립을 서두르고 있던 공부소보 야마오 요조의 지시와, 그와 외국인 교사 고용을 약속했던 이토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헨리 다이어를 비롯한 외국인 교사 고용 교섭을 마무리하고, 사절단보다 먼저 귀국했다. 귀국 후, 공부대보로 승진한 야마오 밑에서 공부대학교 설립에 진력했다. 이후 공부성으로 옮겨 공부성 권대서기관까지 진급, 1882년에는 궁내성 서기관도 겸임했다. 같은 해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의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 대관식 참석에 수행했다. 대관식은 연기되었지만, 유럽 방문 중 헌법 조사를 위해 온 이토와 만나, 오스트리아에서 로렌츠 폰 슈타인의 강의에 이토가 참석했을 때 3번 동석했다. 외국 서적의 번역·간행도 다루어 존 스튜어트 밀의 『경제론』, 테이트의 『훈몽천문략론』, 제레미 벤담의 『형법론강』, 리버의 『자치론』 등을 번역·간행하기도 했다.[36]
1883년에 귀국, 1885년 이토에 의한 내각 제도 탄생에 따라 공부성이 폐지되자, 대신 신설된 체신성에 대서기관으로 취임, 역체국장, 내신국장을 역임한 후, 1888년에 가가와현지사, 1890년에 효고현지사를 역임했다.[36]
2. 5. 외무 관료 및 외교관
1891년 외무차관으로 임명되면서 외무성으로 돌아가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의 외무대신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를 지원했다.[36] 1895년 청일전쟁 처리와 삼국간섭에 대응했으며, 5월 청나라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하였고, 10월 청일전쟁의 공적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1897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 아래 주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스웨덴·노르웨이 특명전권공사 겸임)에 부임했다.[36] 1899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위원으로 참석했고,[36] 1900년 주영국 공사로 임명받아 영국으로 이주했다.
1901년 독일 대리대사의 일본, 독일, 영국 삼국 동맹 제안을 계기로 영국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야시는 본국의 지시로 영국 외무 장관 제5대 랜즈다운 후작 헨리 페티피츠모리스와 협상을 거듭하여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이 공적으로 2월에 자작으로 승작되었다.[36]
1903년 5월, 영국의 엠파이어 롯지 2108번지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15] 이듬해 1904년에는 이 롯지 마스터에 취임하여 일본인 최초의 로지 마스터가 되었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 12월 2일 런던의 재영 일본 공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되면서 하야시는 초대 주영 대사로 임명되었고, 일본 외교관으로서는 최초로 특명전권대사가 되었다. 그해에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였다.[36]
2. 6. 영일 동맹 체결
1901년, 독일 대리 대사가 일본, 독일, 영국 삼국 동맹을 제안하자, 이를 계기로 영국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야시 다다스는 본국의 지시로 영국 외무 장관인 제5대 랜즈다운 후작 헨리 페티피츠모리스와 협상을 거듭하여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3] 이 공적으로 2월에 자작으로 승작되었다.2. 7. 각료 시대
1891년 외무차관으로 임명되면서 외무성으로 돌아가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의 외무대신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를 지원했다.[36] 1895년 청일전쟁 처리와 삼국간섭에 대응하였고, 5월 청나라에 특명 전권공사로 부임하였으며, 10월 청일전쟁의 공적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1897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 아래 주러 공사에 임명되어 러시아(스웨덴·노르웨이 특명 전권 공사도 겸임)에 부임했다. 1899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위원으로 참석하였고, 이듬해 1900년 주영 공사로 임명받아 영국으로 이주했다.
1901년 독일 대리 대사의 일본, 독일, 영국 삼국 동맹 제안을 계기로 영국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야시 다다스는 본국의 지시로 영국 외무 장관인 제5대 랜즈다운 후작 헨리 페티피츠모리스와 협상을 거듭하여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이 공적으로 2월에 자작으로 승작되었다.
1903년 5월, 영국의 엠파이어 롯지 2108번지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이듬해 1904년에는 이 롯지 마스터에 취임하여 일본인 최초의 로지 마스터가 되었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 12월 2일 런던의 재영 일본 공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되면서, 하야시 다다스는 초대 주영 대사로 임명되었고, 일본 외교관으로서는 최초로 특명 전권 대사가 되었다. 그 해에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였고, 1906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 밑에서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했다. 1907년 일불협약, 러일협약, 한일신협약을 연달아 체결한 공적으로 백작에 봉해졌다. 1908년 내각사퇴로 외무대신을 사직하였다. 1909년부터 다음 해 1910년까지 구술하여 적은 《후일담기록》(後は昔の記)을 제작, 간행했다.
1911년 사이온지가 다시 정권을 수립하면서 체신대신으로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 참여했고, 한때 외교 장관도 임시 형태로 겸직했지만, 1912년 내각 총사퇴로 은퇴했다.[37]
2. 8. 만년
1911년 사이온지 긴모치가 다시 정권을 잡자, 하야시는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체신대신이 되었다. 우치다 야스야가 외무대신을 맡았고, 하야시는 임시로 외무대신을 겸직하기도 했다. 1912년 내각 총사퇴와 함께 은퇴했다.[9] 1913년 7월 20일 뇌일혈로 하야마에서 별세했다. 향년 63세. 묘소는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 영원과 가나가와현 오이소마치 묘다이지(妙大寺)에 있다.[37]3. 기타 활동
하야시 다다스는 프랑스 체류 중, 본국의 공부성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공부대학교 설립 준비를 위해 외국인 교사 고용을 담당했다. 이는 야마오 요조의 지시와 헨리 다이어를 비롯한 외국인 교사 고용을 약속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메이지 6년(1873년) 5월, 사절단보다 먼저 귀국하여 공부대보로 승진한 야마오 밑에서 공부대학교 설립에 힘썼다.[15] 이후 공부성 권대서기관, 궁내성 서기관을 겸임하고, 메이지 15년(1882년)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의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 대관식 참석에 수행했다. 이때 유럽 방문 중 헌법 조사를 위해 온 이토와 만나 오스트리아에서 로렌츠 폰 슈타인의 강의에 3번 동석했다.[15]
한편, 외국 서적의 번역 및 간행에도 힘써 존 스튜어트 밀의 『경제론』, 테이트의 『훈몽천문략론』, 제레미 벤담의 『형법론강』, 리버의 『자치론』 등을 번역·간행했다.[15]
메이지 36년(1903년) 5월, 영국의 엠파이어 로지 넘버 2108에서 프리메이슨에 입회했다.[15] 이듬해 37년(1904년)에는 같은 로지의 마스터 (총책임자)로 취임하여, 일본인 최초의 로지 마스터가 되었다.
4. 평가
역사학자 유이 마사오미는 하야시를 집착이 부족하고 야심도 없다고 평했지만, "취미가 풍부하고, 여러 기예에 통달하며, 사물을 냉철하게 본다"는 평도 있다.[1]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자풍 인물"이라고 평했으며, 표표한 인품을 지녔지만, 고집하는 바가 있어 갑자기 격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1] 하야시는 영일 동맹을 중심으로 다각적인 동맹·협상망을 모색하는 외교 방침을 가졌으며, 고무라 주타로와 협력하여 일본 외교를 추진했다.[1]
하야시는 개성소에서 치러진 영문 화역·화문 영역 시험에 합격하여 게이오 2년에 막부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지만, 기쿠치 다이로쿠는 유학생 중에서 처음부터 영어를 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2] 이와쿠라 사절단에 선발되었을 때도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필기자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으며, 구메 구니타케는 그의 비범한 능력에 놀랐다.[2] 번벌 출신이 아닌 하야시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무쓰 무네미쓰의 기대가 컸기 때문이며, 무쓰는 제2차 이토 내각에서 외무 차관으로 하야시를 중용했다.[2]
회상록 『후에는 옛날의 기록』에는 냉정한 관찰과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메이지 24년 오쓰 사건은 일부 신문의 반러 보도에도 책임이 있다고 보았으며, 메이지 28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 측 교섭 전권 이홍장이 저격된 사건(이홍장 저격 사건)을 보고 암살의 무익함을 비판했다.[3] 아오키 슈조와 에노모토 다케아키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평가했는데, 아오키와는 성격이 맞지 않아 악담을 썼고, 에노모토는 정직하지만 사려 깊지 못하다고 평했다.[3]
무쓰와는 메이지 4년부터 30년까지 26년간 교류했으며, 영일 통상 항해 조약 체결로 불평등 조약 개정(조약 개정)에 성공한 무쓰를 "온후하고 독실한 선비가 아니라 재치를 가진 사람"이라고 평했다.[4] 하야시는 주러 공사 부임 중 무쓰의 부고를 접하고 "생애 최고의 지기를 잃었다"라고 슬퍼했다.[4] 두 사람의 오랜 교류는 대조적인 성격, 공통된 경력, 외교관으로서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4]
5. 가족 관계
사토 타이젠과 타키 부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누이 츠루의 남편인 하야시 도카이의 양자가 되었다.[6] 1875년에는 가모 미사오(1858년 - 1942년)와 결혼하여 딸 키쿠와 아들 마사노스케를 두었다.[6]
관계 | 이름 | 비고 |
---|---|---|
친부 | 사토 타이젠 | |
친모 | 타키 | |
친형 | 야마무라 소자부로, 마츠모토 료준 | |
의형 | 사토 쇼츄 | 아버지의 양자 |
친누이 | 키와 | 미사와 세이카쿠에게 시집감 |
조카 사위 | 미사와 겐에이, 오가타 코이준, 미사쿠 린쇼, 타무라 하츠타로 | 키와·미사와 세이카쿠 부부의 딸 키미, 요시에, 모토, 사쿠 자매의 남편 |
양부·의형 | 하야시 도카이 | |
양모·친누이 | 츠루 | |
의형제·조카 | 하야시 켄카이, 니시 신로쿠로 | 도카이·츠루 부부의 친자 |
의형제·조카 사위 | 에노모토 다케아키, 아카마츠 노리요시 | 도카이·츠루 부부의 딸 타츠, 사다 자매의 남편 |
사촌 | 야마우치 사쿠자에몬, 야마우치 테이운 | 아버지의 자매의 아들, 테이운은 아내의 언니의 남편으로 의형이기도 함 |
처 | 미사오 (1858년 - 1942년) | 가모 시게타미의 딸, 야마우치 사쿠자에몬의 양녀 |
장녀 | 키쿠 (1874년 - 1968년) | 후쿠자와 유키치의 차남 후쿠자와 스테지로에게 시집감 |
장남 | 마사노스케 (1877년 - 1958년) | 백작위를 계승. 사위로 시오타 세이키치, 코무로 마사오. 아내 유키는 가와사키 쇼조의 양녀[35] |
손자 | 이와사키 타다오 (1909년 - 1990년) | 마사노스케의 장남, 이와사키 코야타의 데릴사위 |
의손 | 이와사키 요시코 (1913년 - 1994년) | 이와사키 토시야의 차녀, 이와사키 코야타의 조카이자 양녀, 타다오의 아내 |
6. 영전
수여일 | 훈장 및 작위 |
---|---|
1887년 11월 25일 | 勲四等旭日小綬章일본어 [38] |
1891년 10월 29일 | 하와이 왕국 왕관 제1등 훈장[39] |
1895년 10월 31일 | 勲一等旭日大綬章일본어 [26], 남작 |
1899년 12월 27일 | 勲一等旭日大綬章일본어 [27] |
1902년 2월 27일 | 자작 [10] |
1905년 7월 4일 | 로열 빅토리아 훈장 (GCVO) [11] |
1906년 4월 1일 | 勲一等旭日桐花大綬章일본어 [29] |
1907년 9월 14일 | 백작 [40] |
참조
[1]
서적
Who's Who 1914
[2]
학술지
Count Tadasu Hayashi
https://www.cambridg[...]
1913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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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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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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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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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R. Hamersly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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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ADASU HAYASHI THE JAPANESE DIPLOMAT WHO BECAME AN ENGLISH FREEMASON {{!}} Freemasonry Matters
https://freemasonr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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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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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afayett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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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ashi, Tada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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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Latest intelligence –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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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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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University intelligence
The Times
190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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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林董
https://jahis.law.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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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七人の有名な日本人メィーソン
http://www.freemason[...]
東京メソニック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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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3567号「叙任及辞令」
189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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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太政官日誌』明治6年、第152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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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1019号「叙任」
1886-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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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1635号「叙任及辞令」
188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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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3151号「叙任及辞令」
189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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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4943号「叙任及辞令」
189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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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6995号「叙任及辞令」
19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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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286号「叙任及辞令」
191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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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1324号「叙任及辞令」
188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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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1929号「叙任及辞令」
188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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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3704号「叙任及辞令」
189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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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4949号「叙任及辞令」
189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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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5593号「叙任及辞令」
19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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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190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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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7266号「授爵・叙任及辞令」
190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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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2430号「叙任及辞令」
189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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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2503号「叙任及辞令」
189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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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4051号「叙任及辞令」
189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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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7992号「叙任及辞令」
191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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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川崎正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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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일본외교사 사전
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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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일본외교사 사전
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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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叙任及辞令
188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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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叙任及辞令
189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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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授爵・叙任及辞令
190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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